작성날자 : 2018-03-16    조회 : 384
 
금강산과 력사인물들(1)

산좋고 물맑은 금수강산 우리 조국에는 뛰여난 명승지가 많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금강산은 으뜸가는 천하절승으로서 조선의 자랑이며 세계적인 명승지이다.

높이 솟은 수많은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의 기암들, 거대한 층암절벽, 깊은 계곡들, 폭포들과 못들, 골짜기로 흐르는 구슬같은 맑은 물, 바다가의 뛰여난 경치와 아름답고 희귀한 나무들, 이 모든것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금강산은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때문에 옛날부터 우리 인민은 아름다운 이 산을 귀중한 보석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금강석에 비기여 금강산이라 부르며 대대로 귀중히 여기고 사랑해온것이다.

그러면 오랜 력사와 더불어 천하절승 금강산과 이러저러한 인연을 맺고 력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에 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봉래 양사언

우리 인민 누구나가 다 금강산을 사랑하지만 특별히 금강산에 애착을 자기고 금강산에 들어가 살면서 자기의 호마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인 봉래로 정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봉래 양사언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초서체의 명필로, 유명한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양사언(1517-1584)의 자는 웅빈이고 호는 봉래였다.

여기서 봉래라는것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인데 온갖 꽃이 만발하여 향기를 풍기는 봄날의 금강산은 보석과 같다하여 《금강산》, 흰 구름이 층암절벽을 감돌고 우거진 숲속에서 새소리 즐거운 여름의 금강산은 《봉래산》, 만산에 단풍이 물드는 가을의 금강산은 《풍악산》, 눈꽃으로 뒤덮이는 겨울의 금강산을 《개골산》이라고 부른다.

봉건량반가문에서 태여나 어린시절을 보낸 양사언은 154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군수, 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고 각지 명승고적들을 찾아다니며 공부와 유람을 즐기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명승가운데서도 금강산을 가장 사랑하였고 금강산에 많은 일화를 남기였다.

삼일포구역의 장군대와 련화대사이에 삼일포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양사언이 공부하였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서 이 전망대이름을 《봉래대》라고 부르고있으며 그 아래에 있는 굴을 《봉래굴》이라고 한다.

이밖에 금강산에는 《비래정전설》을 비롯하여 양사언과 관련된 전설과 일화들이 많이 전해지고있다.

양사언은 시에 능하여 시조와 한시를 많이 지었으며 인생말년에 해금강의 감호기슭에 집을 짓고 살면서 《금강산》,《유점사》,《보덕굴》,《삼일포》 등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많은 시를 지었다.

특히 삼일포기슭의 봉래굴 바위벽에 새겨져있는 시 《삼일포》는 시형상이 독특하고 글씨 또한 활달한 초서체로서 이름난 시인이며 명필가인 양사언의 시적재능과 뛰여난 필체를 잘 알수 있게 한다.

 

거울속에 피여있는 련꽃송이 서른여섯

하늘가에 솟아오른 봉우리는 일만이천

그 사이에 놓여있는 한쪼각 바위돌은

바다찾은 길손들이 한참 쉬기 알맞구나

 

또한 양사언이 지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조는 당대는 물론 후세 사람들속에서도 널리 애송되였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는 사람이 높은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극복 못할 난관이 없다는 생활의 진리를 비유의 수법으로 깨우쳐주고있다.

양사언은 또한 글씨를 잘 써서 한호(호 석봉), 김정희(호 추사)와 함께 조선봉건왕조시기 3대명필의 한사람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여러 서체들가운데서 해서와 초서 그중에서도 특히 초서에 능하였는데 그의 글씨에서 박력있게 그어진 점과 획들은 가볍게 떠도는 구름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길게 그어진 획들은 거침없이 흐르는 물과 같아 《비운류수》(날아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에 비유되고있다.

양사언이 남긴 수많은 필적가운데서 대표적인것은 내금강 만폭동 너럭바위에 새긴 《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는 여덟글자를 들수 있다. 여기서 봉래, 풍악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이며 원화동천은 만폭동의 다른 이름인데 금강산의 기묘한 아름다움을 다 구현한 으뜸가는 골안이라는 뜻을 담고있으며 활달한 필체로 씌여진 매 글자들은 마치 살아움직이는듯한 감을 주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양사언이 초서체로 이 글을 쓴 다음 산이 3일간 노래하였고 그 글씨의 씩씩한 획이 마치도 룡이 도사리고 앉았다가 날아오르는듯하여 금강산의 웅장하고 신기한 모습과 승부를 겨루기도 한다고 하였다.

명필로서 양사언의 이름은 우리 나라에서뿐아니라 이웃나라에도 잘 알려져있었으며 옛문헌에도 그의 글씨는 팔의 운동법을 깊이 체득하여 초서체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예로부터 훌륭한 사람의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고 한다.

양사언이 이름난 시인으로, 명필로 력사에 자기의 이름을 남길수 있게 된것은 전적으로 그의 어머니의 공로라고 할수 있다.

양사언은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으며 따라서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벼슬길에 나설수도 량반의 지위를 계승할수도 없었다.

그러나 후세에 사람들로부터 조선봉건왕조시기 어머니의 본보기로 높이 칭송된 양사언의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으로서 자식의 앞길을 열어주었고 양사언은 적서의 차별을 받지 않고 사대부의 직위에 올라 뛰여난 재능으로 세상에 자기의 이름을 떨칠수 있었다.

이처럼 이름난 시인이며 명필가인 봉래 양사언은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나라 서예의 조형예술적경지를 새롭게 개척하고 아름다운 조국산천과 인민들의 생활모습을 형상한 우수한 서예작품들과 시작품들을 창작한것으로 하여 력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였으며 그의 이름은 금강산에 깃든 일화와 전설들과 함께 후세에 길이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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