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날자 : 2018-07-11    조회 : 15
 
금강산과 력사인물들(4)

김시습(1435년-1493년)은 15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진보적인 학자이며 문인이다. 력사에 《5세문장》, 《생륙신》,《금오신화》의 저자 등으로 자기의 이름을 남긴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고 호는 매월당, 동봉, 설잠 등이다.

시습은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세살적에 솔잎에 맺힌 이슬을 보고

      솔잎에 맺힌 이슬은

      푸른 바늘에 꿰인 구슬인양 하여라  

라고 읊었다고 한다.

다섯살 때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당시의 늙은 재상 허주를 대하여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 어이 늙다 하리

라고 그의 심정을 그대로 담아 읊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케 하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소문은 궁중에까지 알려져 당시 국왕이였던 세종에게 불리워간 시습은 《5세문장》이라는 칭찬까지 듣고 상으로 비단 수십필을 받았다.

학문연구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던 그는 집현전의 선배학자들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일심전력하였다.

그러던 1455년에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왕 단종을 밀어제끼고 제가 왕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격분을 금할수 없었던 김시습은 분연히 읽던 책을 불사르고 선비의 의관을 찢어버린후 방랑할것을 결심하면서 남아가 세상에 나서 자기 포부를 펴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산으로 들어가서 산사람노릇이나 하겠다고 울분을 토로하였다.

그는 방랑의 길에 나서면서 머리를 깎고 스님차림을 하였는데 다만 수염만은 깎지 않았다. 그는 이와 같은 자기 행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머리를 깎음은 세상을 피함이요

     수염을 남김은 대장부의 표적일세

시습이 처음 송도(개성)를 거쳐 관서일대를 편답하고 관동지방에 발길을 들여놓게 된것은 26살쯤 되던 때인 1460년경이였다. 그는 천하명승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팔경》을 돌아보면서 황홀하고 감동된 심정을《사람의 마음과 눈을 씻을수 있으며 유쾌한 오늘의 회포는 도무지 무어라고 말할바를 모르겠다.》고 피력하였다. 그는 《관동의 명산》이라는 시에서 금강산과 그 일대의 장엄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격조높이 노래하였다.

     오대산 푸르러 일만겹이요

     금강산 희디희여 일천층이라

     국도섬 파도소리 우뢰마냥 장하고

     총석정 돌기둥은 서슬이 엄하여라

 

     삼일포 모래밭은 깨끗도 한데

     단서암 여섯글자 이끼 끼였네

     하늘에 잇닿은듯 바다 넓은데

     삼신산 불로초도 여기서 캐겠구나

김시습은 금강산을 사랑하여 무려 8번이나 관동의 명승을 찾아다니는 과정에 수많은 시와 일화를 남기였다. 그때 그의 창작과 관련한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있다.

여름에 한소나기 퍼붓고 나면 골짜기에서는 삽시간에 골물이 터져서 사품치며 흘러내리군 하였다. 시습은 이런 때면 의례히 100여장의 종이장을 안고 산골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여울목의 바위등에 자리잡고 앉아서 세조의 그릇된 행위에 항거하는 시편들을 썼다.

시한편을 쓰고는 목메여 읊고 읊다가는 여울물에 띄워 보냈다. 이렇게 쓰고 읊고 여울물에 띄워 보내기가 날에 날마다 거듭되였다. 그때에 그가 하루에 쓴 시만도 무려 백여수에 달했다고 한다.

후에 누구인가 이 사실을 두고 그 정상을 시에 담아 이렇게 읊었다.

     사품치며 흐르는 물 어디로 가나

     굽이치며 흘러서 바다로 가지

     푸른 하늘 한쪼각 같은 종이쪽에

     읊고 쓰고 쓰고 읊고 여념 없었네

김시습은 이처럼 울분의 심정을 안고 금강산을 중심으로 하여 관동일대를 돌아보며 읊은 시들을 따로 모아 시집 《탕유관동록》을 편찬하였다.

그는 그후에도 국내 각지로 방랑생활을 계속하는 과정에 많은 작품들을 썼다. 그동안 세조와 그의 뒤를 이은 성종이 시습을 불렀으나 더러운 세상에서 벼슬길을 단념한 그의 결심을 변경시킬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후세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끝까지 반대한 《생륙신》의 한사람으로 불리웠다.

김시습은 또한 우리 나라 문학사상 최초의 소설문학으로서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한 유명한 작품들을 내놓은 재능있는 소설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리생의 사랑》, 《만복사의 윷놀이》, 《부벽정의 달맞이》, 《꿈에 본 남염부주》,     《룡궁의 상량잔치》등 다섯편을 묶어 단편소설집 《금오신화》를 내놓았다. 《금오신화》에 실린 소설들은 그 사상적내용이 진보적이고 형식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것으로 하여 문학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 그후 김시습은 양주군 수락산에서 10년간 머물면서 철학문제를 연구하여 중세기 철학가로서는 자연현상을 비교적 옳게 관찰해석하였으며 무신론적인 견해도 내놓았다.

김시습이 창작한 문학작품들과 그의 철학적, 사회정치적견해를 론술한 글들은 그가 살고있던 당시의 정치생활, 경제생활을 비롯한 그 시대의 현실을 비교적 진실하게 반영한것으로 하여 15세기 후반기 우리 나라의 진보적문학과 사상조류의 발전을 연구하여 인식하는데서 가치있는 유산으로 된다.

김시습은 이처럼 진보적인 사상과 립장에 기초하여 사회비판적이며 사실주의적인 우수한 시와 소설작품들을 창작함으로써 민족문학의 발전력사에 중세소설문학의 개척자로 이름을 떨친 재능있는 창작가, 철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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